서울의 한 오래된 고택.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는 라일락 나무가 있는 동네에서 황지훈 대표는 기자를 맞았다. 공간과 사람, 시간이 조용히 어우러진 사무실은 쿠비오컴퍼니가 지향하는 태도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쿠비오컴퍼니는 2022년 설립 이후, 브랜드의 이야기가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날 수 있도록 설계해 왔다. 그렇게 F&B, 팝업스토어, 라이프스타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50여 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황지훈 대표는 공간을 이루는 작은 것들을 오래 바라본다. 한낮 벽에 닿는 빛, 머무는 공기, 나무가 쌓아온 시간처럼, 스쳐 가는 변화를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과 사람의 흔적을 포착하고, 브랜드가 품은 고유한 이야기를 공간 속에 부드럽게 녹여낸다.
쿠비오가 설계하는 공간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다. 최근에는 ‘누구나의 방’ 프로젝트를 통해 공간디자인이 사회에 던질 수 있는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향해 묻고 답하는 일이라는 믿음에서다.
쿠비오컴퍼니 황지훈 대표는 예술과 건축을 아우르는 시선으로, 사람과 시간이 머무는 공간을 만들어 왔다. 깊이 있는 관찰과 대화를 통해 브랜드의 본질을 공간에 녹여낸다. 사회적 질문을 던지는 프로젝트까지 확장하며, 공간을 통한 진정한 연결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쿠비오컴퍼니]
쿠비오컴퍼니는 어떤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나.
브랜드를 디자인하고, 그 브랜드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단순히 멋진 공간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와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순간을 설계한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간에 머무는 사람이다. 공간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기획은 세심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브랜드가 가진 이야기를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게 하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겉만 좋은 공간이 아니다. 브랜드가 어떤 사람과 어떤 삶을 나누게 될지를 고민하며 완성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원래 미술을 전공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건축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게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왜 건축이었는지도 궁금하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잘한다고 믿었다. 자연스럽게 그 길을 따라갔지만,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실제 작업 사이에 차이가 컸고, 나의 성향과도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 무렵 주변에서 조언을 들을 기회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건축을 권했다. 그중 “건축은 원래 예술이었다”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선 대신 공간을 다뤄보면 전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그 선택이 이후 방향을 많이 바꿔놓았다.
그 조언을 들었을 때, 확신이 들었나.
확신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내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두가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진정성이 담긴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회사를 설립하고 처음 1~2년은 트렌드를 따르는 데 집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의 프로젝트들은 큰 주목을 받았고, 회사가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양한 매거진에 소개되며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고, 작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작년을 기점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함께했던 클라이언트들이 사업을 접거나 브랜드를 정리해야 한다는 소식을 잇달아 전해왔다. 건강 문제, 과도한 투자, 시장 변화 등 이유는 달랐지만, 모두 내가 함께한 프로젝트였다. 처음엔 성공이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결국 내 실패로 받아들였다. 그 충격은 컸다. 작년 초, 두 달 동안 모든 프로젝트를 멈추고 여행을 떠났다.
오래된 공간들을 찾아 관찰하며, 예쁘고 멋진 것만이 공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사람과 시간이 쌓여야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방향을 바꿨다.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과 함께 이어질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기로. 그렇게 준비한 프로젝트들은 예상보다 훨씬 좋은 반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계산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서 성과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지금은 공간이란 결국 계산이 아니라 사람의 영역이라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전하게 되었다.
2024년 혁신 리더 ‘공간디자인 대상’을 수상했다. 수상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나.
상 자체가 실력이나 성과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클라이언트들이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더 기뻐해 주고, 함께 축하해주었기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응원해 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현재 쿠비오가 집중하고 있는 디자인의 방향성은 무엇인가? 이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가 있다면.
최근에는 환경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디자인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강렬하고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따르지만, 이제는 파괴보다 보존과 보완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기존의 요소를 살리면서도 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디자인이라고 믿는다. 개인의 실천에는 한계가 있지만, 산업 차원에서는 충분히 변화를 이끌 수 있다. 좋은 디자인이란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조화롭게 드러내는 일이다.
지속가능한 공간을 위해 실제 프로젝트에서 고려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친환경적인 소재 사용이다. 현재 사용 중인 공간도 약 50년 된 주택이다. 처음에는 전면 리모델링을 계획했지만, 원래 지닌 분위기와 정서를 지키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판단해 최소한으로만 손을 보았다. 기존 구조와 고유한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데 집중했으며,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그 위에 자연스럽게 새로운 디자인을 더 하는 것을 추구한다. 현재 진행하는 프로젝트에도 이 점을 반영하고 있다.
쿠비오컴퍼니는 공간을 '경험의 장'으로 삼는다. 사람의 흔적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디자인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성수 굿피플 전경. [사진=쿠비오컴퍼니]
브랜딩을 업으로 삼고 있는 만큼, 개인적으로 선호하거나 애정을 품고 있는 브랜드가 있다면? 아울러 그 브랜드의 어떤 점에서 매력을 느끼는지도 함께 듣고 싶다.
화려한 브랜드보다 오래된 동네 슈퍼마켓이나 작은 델리 같은 공간에 더 마음이 간다. 간판이 바래고 진열대가 낡았더라도 그 안에는 시간과 사람이 만든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울에도 그런 곳이 많다. 오래된 빵집, 단골이 꾸준한 미용실, 매일 같은 시간 문을 여는 분식집처럼 이름은 특별하지 않지만 동네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공간들이다.
브랜드를 이름이나 외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공간이 지역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지, 시간이 지나도 같은 태도를 지키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나는 그런 공간과 브랜드에 더 애정을 느낀다.
클라이언트와 열 번이 넘는 미팅을 진행한 사례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눠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클라이언트와의 협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방향을 정확히 설정하는 것이다. 많은 클라이언트가 빠른 결과를 원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물이 브랜드와 진정으로 연결돼 있는지 여부다. 이미지 몇 장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지양한다. 대신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어떤 경험을 만들고 싶은지를 묻고 듣는다.
초기 미팅은 전체 단계를 더 명확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시간이다. 브랜드의 결을 정확히 이해하고 나면 방향은 한결 분명해진다. 그래서 때로는 클라이언트의 삶과 생각을 인터뷰하거나 식사를 함께하고, 동네를 함께 걷기도 한다. 좋은 공간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작은 깊은 대화에 있다.
일상에서도 관찰을 자주 하는 편으로 보인다. 혹시 그런 태도가 평소에도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편인가? 아니면 작업을 할 때에만 유독 더 집중해서 관찰하게 되나.
혼자 카페에 가는 걸 좋아한다. 조용히 앉아 핸드폰 대신 주변을 관찰한다.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음료를 마시고, 얼마나 머무는지, 무심한 행동 속에 숨어 있는 패턴을 읽어낸다. 그렇게 모은 장면들은 자연스럽게 나만의 데이터가 된다. 특히 콘셉트가 뚜렷한 공간에서는 오너의 스타일과 손님의 분위기가 닮아가는 모습을 자주 본다. 공간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방식은 그런 데서 드러난다. 좋은 공간은 누가 오는지를 떠올리는 데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디테일이 결국 모든 차이를 만든다.
전주 즐거움한옥마을점 전경. 블랙과 화이트가 조화롭게 배치돼 공간에 단정한 인상을 더한다. 쿠비오컴퍼니는 기존의 지역 정서와 쌓여온 시간을 존중하며, 그 위에 사람의 경험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쌓이는 공간을 만든다. [사진=쿠비오컴퍼니]
쿠비오컴퍼니는 여백을 설계의 축으로 삼아 공간에 균형과 여유를 더한다. 절제된 미감 안에서 사람의 움직임과 브랜드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밀도 있게 완성한다. [사진=쿠비오컴퍼니]
프로젝트 ‘누구나의 방’을 기획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나.
지금까지는 주로 브랜드와 상업 공간을 다뤄왔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는 늘 상업성과는 다른 방향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올해 초, 여러 프로젝트로 주목을 받던 시기에 문득 ‘내가 전하고 있는 이야기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청각장애인 바리스타 대회를 알게 되었고, 한 장면이 떠올랐다.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 바리스타가 같은 조건에서 커피를 내린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차이를 느낄까. 이 질문이 ‘누구나의 방’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됐다.
지난 5월 3일과 4일 열린 첫 행사는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 바리스타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한잔의 커피를 매개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 소통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청원복지관과 바리스타 챔피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인상 깊은 행사가 되었다.
‘누구나의 방’은 이름 그대로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공간이다. 각자의 삶과 이야기를 존중하며 함께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그동안 팝업이 소비 중심으로만 소비되는 현실에 아쉬움을 느껴왔다. 브랜드 중심이 아닌, 사람과 이야기 중심의 새로운 팝업을 만들고 싶었다.
이 프로젝트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의 경험이 다음 이야기를 만들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좋겠다. 앞으로도 이 공간에서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또 현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현재 일본 도쿄의 소품 브랜드와 여러 차례 미팅을 진행하고 있다. 서로의 철학과 방향성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 맞춰가고 있다. 올 상반기 안에 구체적인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의 디자인은 세계적으로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국내에서 치열한 경쟁보다는 해외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더 자유롭게 풀어보고 싶다. 해외에서의 경험은 결국 다시 돌아왔을 때 더 철학적인 프로젝트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브랜딩과 공간디자인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는데, 최근에는 광고 분야로도 확장했다. 브랜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광고를 택한 이유가 있었나.
아무리 좋은 공간이라도 사람에게 닿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공간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광고를 택했다. 예전 광고처럼 장면과 메시지가 오래 기억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그저 예쁜 화면이 아니라, 사람과 브랜드 사이에 진짜 이야기를 건네는 광고여야 한다. 공간이 멈춰 있지 않고, 브랜드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빠르게 움직이고, 추진력도 강한 편으로 보인다. 팀원들과 함께 일할 때는 속도나 방향을 어떻게 맞춰가는지 궁금하다.
나는 빠르고 추진력 있게 일하는 편이다. 그래서 면접 단계부터 회사의 방향성과 일하는 방식을 솔직하게 설명한다. 이 과정에 공감한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며 일하고 있다. 쿠비오컴퍼니는 정해진 프로세스를 따르기보다, 각자가 스스로 길을 찾아가며 프로젝트를 완성해 나간다. 처음에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그만큼 더 깊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충분히 익힐 수 있다. 하지만 일에 관한 생각과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회사는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를 지향한다. 문화비 지원과 경험 공유를 통해, 각자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쌓이고 그것이 결국 더 탄탄한 결과물로 이어진다.
쿠비오의 철학과 비전은 충분히 전달된 듯하다. 지닌 바람이나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에 대해 듣고 싶다.
공간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가 바라는 것은 공간에 더 큰 가치를 담는 일이다. 공간은 결국 누군가의 시간이 머무는 곳이다. 그래서 제품이 아니라 경험을, 브랜드보다 사람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디자인이라는 언어로 사회와 소통하고, 사람을 중심에 두는 시선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의 방 프로젝트도 시간을 들여 천천히 쌓아가는 프로젝트로 남기고 싶다.